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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김진영선교사)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 보내며

mediaswm 2025.11.08 15:50 조회 수 : 183

사랑하는 아내, 김은경선교사의 삶의 여정을 돌아보며 하나님과 함께 걸어온 믿음과 헌신, 가정과 사역에 남긴 사랑과 섬김의 흔적을 함께 기억하며, 아내의 헌신과 희생, 사랑과 믿음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합니다.

 

첫째: 선교사 헌신의 길

 

김은경선교사는 1980년 12월 WMC겨울수련회에 참석하면서 학생선교단체에서 제자훈련을 받으며 선교사로 헌신합니다. 그리고 대학생 간사로서 저와 함께 세리토스, 사이프러스 지역 고등학교와 인근 대학교에서 Bible Study그룹을 인도하며 복음 전파와 제자훈련 사역에 헌신합니다. 그 당시 WMC간사로서 남녀 데이트가 금지되는 시절이라 데이트 한 번 하지 못하고 1986년 아프리카 케냐 단기선교 사역을 마친 마지막 날 밤, 아프리카의 별이 빛나는 밤에 저는 김은경선교사에게 프러포즈했고 아내는 그 자리에서 예스(yes)했습니다. WMC 대표되신 김정복 목사님의 승낙을 받고 1년 데이트 기간을 거쳐 1987년 6월에 약혼하고 6개월만에 1988년 1월에 결혼했습니다. 그 당시 제가 Talbot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시절이라 비록 가난했지만 참 행복했습니다. 1988년 12월 베델교회 대학 청년 담당 목회자로 처음 부임했을 때 리더들이 질문한 내용은 ‘언제 떠나실 것입니까’, 그 이유는 담당 사역자가1년 이상을 있지 못하고 떠나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선교사로 헌신했기 때문에 선교지로 가겠지만 4년을 약속할 테니 우리를 믿고 함께 신앙생활하자’고 말했지요.  교회 분열의 아픔도 있었지만 고등학생, 대학 청년들을 데리고 바하 캘리포니아 산시몬, 멕시코 오하카 단기 선교를 통해 대학 청년의 부흥을 경험하며 손인식 목사님께서 부임하신 이후 폭발적인 교회 성장도 지켜보며 EM 사역을 이진수 전도사와 함께 시작했습니다. 4년의 기간 동안 대학, 청년들 가운데 목사와 선교사, 사모로 헌신하여 교회와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저희는 약속한 4년의 기간이 되어 저희는 C&MA 선교사로서 1992년 12월 27일 베델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받습니다. 

 

둘째: 러시아 칼믹키아 공화국과 터키(튀르키예) 선교사의 길

 

93년 1년의 선교훈련을 뉴욕 교단 ATS신학교에서 받고 부임한 첫 선교지는 러시아입니다.  1991년 소련의 멸망 이후 혼돈과 혼란한 상황 중에 모든 공교육이 무너졌기 때문에 선교 본부의 정책에 따라 자녀가 6살이 되면 부모를 떠나 초등학교 1학년부터 선교사 자녀 기숙사에 들어가야 합니다. 1996년 6살된 첫 아이 요한이를 독일에 있는 BFA (Black Forest Academy)학교로 보내고, 일년 후 97년 둘째 요엘이를 보내게 됩니다. 부모의 품을 떠나 어린 자녀들을 보내는 것이 저희들에게 큰 아픔이며 슬픔이었습니다. 어린 자식들을 보내고 밤마다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내는 우리의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더 아름답게, 더 훌륭하게 키워 주실 것을 믿으며 매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두 아이들은 건강하게 잘 자랐고 새 가정을 이루게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기도 동역자님들의 중보기도임을 믿습니다. 러시아 칼믹키아 사역은 초기는 여러 도전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저희 아파트에서 시작된 성경공부, 영어캠프, 문화사역, 긍휼과 구제, 다양한 사역을 통해 1998년 4월19일 부활절 주일에 주사랑교회 창립예배를 갖습니다. 교회가 부흥하고 여러 지역에 교회가 개척됨으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의 핍박과 방해로 2001년 결국 러시아에서 추방을 받습니다.

 

2002년 저희는 사역지 터키(튀르키예)로 부름을 받고 사도 바울의 고향 다소에서 2년 동안 터키어와 터키 문화를 배우게 됩니다.  언어 공부를 하는 동안 미제국주의 스파이라고 저희 팀 세 부부는 경찰서에서 12시간 붙잡힌 상태에서 심문을 받았고 결국 무혐의로 풀려나기는 했으나 계속 감시하기 때문에 다소를 떠나 수도 앙카라에서 BAM전략으로 4년 동안 비즈니스를 운영하게 됩니다. 비즈니스의 B자도 모르는 세 목사 가정이 운영하는 비즈니스는 4년만에 이윤을 남기기 시작하며 사업이 안정되지만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이 땅의 영적인 회복을 위한 연합기도사역으로 부르시게 됩니다. 연합기도사역에 집중하기 위해 비즈니스 사역을 그만두고 싶다는 저희의 요청에 대해 선교 본부는 비즈니스를 계속 해야 하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사임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교단 선교사 직책을 사임한다는 의미는 우리의 모든 생활비, 자녀교육비, 건강보험, 은퇴 Pension등 모든 지원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C&MA 선교사를 사임하는 것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고 기도하는 중에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결단하자는 아내의 격려가 있었기에 2008년 3월31일 사임했습니다.

 

매년 연합기도회 준비, 특히 2010년 에베소 연합기도회를 준비하는 중에 C&MA의 재정이 끊어지고, 영적인 공격과 도전,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연합기도사역이 하나님의 부르심인가, 제대로 결정한 것인가 여러 생각과 질문 때문에 하나님의 분명한 인도하심을 구하기 위해 2008년 9월, 40일 금식기도를 터키 남부 한 수도원에서 하게 됩니다. 금식 기도 중 아내의 식도암이 발견된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러시아에서 자녀들을 내려놓았고, 터키 연합기도사역 때문에 교단 선교사 직책도 내려놓았는데 아내에게 식도암이 발견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007년 터키 말라티아와 아프가니스탄 순교 사건으로 인해 집회 안전문제로 2010 에베소 연합기도회 대회장을 거절하신 손인식 목사님, 준비위원장을 거절하신 김승욱 목사님께서 아내의 식도암 소식을 듣고 아내를 위해 기도해주시면서 성령님께서 두 분의 마음을 바꾸시고 2010 에베소 사역을 진행할 수 있던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내에게 식도암이 발견되었을 때 둘째 이후 15년만에 주신 늦둥이 요셉의 나이가 2살이었는데, 아내는 요셉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히스기야처럼 15년을 더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대로 하나님께서 아내의 기도를 응답하셨고 요셉이가 자라가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아내의 기쁨과 행복이었습니다.

 

셋째: 본향을 향한 길

 

어느덧 15년의 세월이 흘러 2023년 12월 19일 아내 생일 다음 날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진 아내를 911을 불러 병원에 입원했을 때 담당 의사는 아내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 좋겠다 하여 임종예배까지 준비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많은 기도 동역자의 중보기도로 70일 동안 ICU에 있던 아내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 후 여러 번의 시술, 그리고 2025년 7월 세 번의 큰 수술을 통해 80일 병원에서 지내게 됩니다. 아내는 10월 8일 집으로 와 저와 함께 2주간 함께 지낸 후 22일 병원에 다시 입원하였고 26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안타까움, 온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마음껏 먹고 마시고 걸을 수 있는 아내의 모습을 간절히 바라고 기도했지만 이제 아내는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이 안식하며 우리 또한 다시 만날 소망을 갖고 큰 위로를 받지만 아내의 빈 자리가 너무 크게 다가옵니다. 2027년 B2N에 함께 참여하자고 기도했는데...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먼저 간 성도들과 아내가 천상에서 B2N을 바라보며 4월18일 아스펜도스 원형극장에서 터키, 아프간/이란/이라크/시리아 난민 성도들, 그리고 기도 동역자들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릴 것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라와 민족이 서로를 향한 미움과 증오가 아닌 용서와 화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터지고 축복의 강물이 그 땅을 적시고 마지막 때 영적대추수가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김은경 선교사와 저희 가정과 사역을 위해 늘 기도와 사랑으로 함께 하신 기도 동역자님께 진심으로 깊이 감사드립니다.

 

‘여보 이제 눈물도 고통도 없는 주님의 품안에서 편히 쉬고 다시 만나요. 고생 많았어요. 당신을 정말로 사랑했고 영원히 사랑해요. 나와 함께 살아줘서 고맙고 행복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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